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군도 (문단 편집) === 일본 군도의 의미 === 사람들은 일본 군도의 존재를 [[제국주의]]와 [[사무라이]]라는 두가지 요소에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국민[[무사도]]의 강조와 [[파시즘]]의 열풍에 의해 생겨난 과거의 망령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러한 점에서 일본 군도는 실전도검이며, 항공기가 폭격하고 [[기관총]]이 난무하는 시대에 칼싸움을 위해 다시 등장한 시대착오적인 물건 아니면 일본군이 확장한 전선마다 자행한 민간인 [[학살]]시에 요긴하게 쓰인(예시:[[:파일:attachment/nankingmassacre2.jpg|#]], [[100인 참수 경쟁]]) 도구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일본 군도는, 특히 [[신군도]]는 비록 외형이 일본도의 형태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유럽 세이버가 가지고 있던 의미를 그대로 승계한 것이며 실제 전장에서의 의미와 역할도 동일했다. 정확히는 19세기 후반에 세이버가 가지고 있던 의미를 승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세]]-[[르네상스]]까지만 해도 도검은 실전에서 싸우기 위한 무기였지만, 18세기에 들어 도검은 권위의 상징, 소속부대의 표시, 계급장과 같은 역할을 겸하게 된다. 실전에서의 사용은 그 다음 일이었다. [[기병]]들에게는 여전히 실전의 중요한 도검이었지만 [[보병]]들에게는 의미가 많이 약해졌고 보병들은 75cm정도의 짧은 검을 소지했으며 긴 장검은 장교들과 일부 정예부대만이 소지하게 되었고, 이들이 실전에서 검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장식의 형태와 유무, 손잡이나 가드의 형태, 손에서 떨어트리지 않기 위한 Tassel등의 요소들이 실전보다는 각 부대와 병과, 계급을 구분하기 위한 하나의 표시 도구로써의 의미가 훨씬 중요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19세기 중후반, [[총검]]전투조차도 찾아보기 힘들어진 이 시대에 이르면 도검의 상징적 역할은 더욱 커진다. 여전히 도검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들어가는 고려 대상은 얼마나 실전적인가, 실전에서 검증된 형태인가, 베기와 찌르기에서 얼마만큼 역할을 할 수 있는가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칼이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하고,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즉 칼에게 이미 요구되고 있던 상징으로써의 역할이 더더욱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장교들이 칼을 쓰게 되는 주요 목적은 상대에게 달려들어서 칼싸움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돌격시 병사들을 이끌고 선도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위치와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 즉 지휘도로써의 역할이 더욱 컸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화를 단행했으며, 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군도의 착용 방식부터 외형상의 특징에 이르기까지 유럽 세이버의 의미와 형태를 완전히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물론 도검은 기병용의 경우 실전 도검으로써의 요소가, 보병도의 경우 상징적인 역할이 더욱 컸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외형과 장식의 형태와 유무로 계급을 구분하던 버릇도 마찬가지다. 이는 일본도 형태를 가진 신군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근본적으로 권위와 상징을 필요로 하던 [[헌병]], 장교, 부사관들만이 도검을 소지할 수 있도록 하고, 일반병 등은 장검을 못 가지게 했던 점에서도 이러한 유럽 세이버가 가지고 있던 상징적 위치를 그대로 계승했음을 잘 보여준다. 만일 시대착오적인 도검전투를 생각하고 있었다면 일반병이 검을 가지는 것도 못하게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일본 군도는 세이버 외장을 가진 구군도 시절부터, 신군도와 3식에 이르기까지 항상 실전이라는 요소를 생각하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 세이버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1차대전까지의 유럽 장교들이 그러했듯이 군도는 지휘도였으며 상징이었고 병사들을 이끄는 장교들이 부사관과 병들과 구분되기 위한 하나의 코드였다. 19세기 유럽군의 부사관이 창을 들고 다니던 것과 같은 이유인 것이다. 물론 전쟁터에서 돌격할때 손에 드는 물건이므로 다른 무기를 들 수 없으니 적과 마주할 때에는 충분히 찌르고 벨 수 있을 만큼의 강도를 마땅히 가져야 한다. 이는 화려한 장식이 너무 많아 무기라기보다 차라리 인테리어 제품에 가까웠던 17세기 유럽의 장교용 폴암에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것이었고, 18~20세기의 유럽 세이버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일본 군도도 똑같았다. 일본 군도의 사용법인 군도의 조법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군도의 조법은 상대의 검이나 총검과 교전하는 내용이 전혀 없고, 오직 선 상태에서 빠르게 발도하여 적을 제압하는 내용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일본의 군도술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시대착오적인 사무라이 환상의 재림이 아니라, 군도라는 장비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2차대전 당시의 경향을 감안하여 최소한 간단하고 합리적으로, 쉽고 빨리 배울 수 있게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럽 세이버와 비교한다면 영국 말콤 폭스 대령이 주도한 군용검술의 간략화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유는 비슷했다. 둘 다 도검의 전쟁터에서의 사용비율이 매우 적었고 당시 실전에서 굳이 시간 들여가며 심도있는 검술을 연마해야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최소한의 기량만 갖추는 선에서 끝내고자 한 것이다. 첨언하자면 검객이었던 알프레드 휴턴 대위는 이걸 아주 싫어해서 〈Cold steel〉 등의 검술서를 출판해가며 정면으로 반발했다.] 실질적으로도 일본 군도의 실전투입량은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는데, 군도수리반의 군속으로 일했던 나루세 칸지(成瀬関次)의 나루세 수리반이 북지나방면군에서 9개월간 수리한 군도는 총 1681자루였는데, 이 중에서 약 500여 자루(30%)만이 실전투입에서 고장난 군도였고, 나머지 1100여 자루는 모두 무리한 시험베기[* 일본군 부사관이나 장교들이 모두 검술을 배웠던 것은 아니다. 군도 조법의 전군보급은 1940년이 되어서였고, 진검은 장교가 되어서 처음 잡아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검도]]를 배우기는 하지만 [[죽도]]와 진검은 차이가 있었으므로, 베기에 대해 익숙하지는 않았다. 통나무를 잘못 때리거나 [[철조망]]을 자르거나 기타 무리한 짓으로 칼날이 휘거나 이가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나 [[행군]]중의 사고에서 고장난 것이다. 즉 일본 군도는 근본적으로 서양 세이버의 전통을 이은 권위의 상징/계급의 표상/병과의 표시/지휘도로써의 위치를 가진 도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 군도가 그 당시 현대적인 개념이였나 하면 유럽국가보다 30년 늦게 폐지[* 대체적인 유럽국가들은 1차대전 종전(1917)이후 실전 도검을 더이상 채택하지 않았고, 장교의 복장 규정에서도 전투복에서는 삭제되었다. 미군의 M1941커틀러스도 M1917의 일부 설계변경품일 뿐이었다. 일본의 실전도검 폐기는 1945년 패전하고 나서.]된 것은 옹호 불가능으로, 자신들도 전투능력보단 보단 복식규정의 일부란 이유로 군도를 채택했으면서[* 첫 신군도인 94식은 쇼와 9년(1934) 2월 14일자 육군복제중개정령으로 제식이 정해졌다. '육군복제중개정(陸軍服制中改正)'이란 육군 의복 제식 규정 중 일부를 개정한다는 의미이다.] 러일전쟁 등에서 군도로 효용성을 봤단 이유로 '''[[남부권총|부사관급에 지급할 화기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끝냈을 방식을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계속 사용했다는 것. 동시대 다른 나라 군대와 비교되는 특이한 행동이어서 1/35, 1/72 스케일의 소형 밀리터리 [[프라모델]] 피규어 중 구 일본군 [[피규어]]는 어떤 회사 제품이든지 일본도를 뽑아든 장교의 피규어가 들어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